낯설면서 친숙한 이웃나라 사람들의 상처와 서원, <개구리>(모옌, 민음사, 2012) 서평
중국과 수교를 맺은 1992년 즈음에는 중화권 영화의 영향력이 컸다. 영웅본색, 아비정전과 같은 현대물이나 황비홍, 천녀유혼, 강시선생과 같은 다양한 영화가 한국인의 사랑을 받았고 중국인에 대한 이미지도 좋았다.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붉은 수수밭>(장이머우 감독)은 중국 근현대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수교 이후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급격하게 변모하고 중국인이 일자리를 찾아 국내에 몰려오며 이미지가 급격히 나빠졌다. 중국 경제가 성장하고 군사대국과 패권국의 이미지를 내세우면서 혐오의 감정까지 생겨났다. 수교 이후 서로의 근현대사와 민중들의 삶을 알아나갈 기회가 부족했던 점이 혐오를 부추기는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모옌은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이다. 중국 근현대를 배경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주목하여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모옌이란 필명은 ‘글로만 쓸 뿐 말로 하지 않는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중국에서 작가 활동 한계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학업을 포기하고 농촌 생활을 하다가 면화 가공 공장 직공으로 일했다. 20세의 나이로 인민해방군에 입대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97년까지는 인민해방군 소속 작가로 활동했고 지금은 고향인 산둥 대학에 재직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작가는 향토적이며 중국적인 환상적 리얼리즘을 잘 표현한다고 평가된다. 장이모 감독의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소설인 <홍까오량 가족>(문학과지성사, 2007), 201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개구리>(민음사, 2012)를 포함해 <풍운비둔>(랜덤하우스코리아, 2004),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1,2>(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술의나라>(국내 미출간, 2012)와 같은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 소설은 중일전쟁(1937~1945)에서 시작해 문화대혁명을 거쳐 2000년대 초반까지의 중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중국은 1950년대에서 60년대까지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소설 속 가오미 둥베이향도 고구마가 풍년이면 출산율이 높아져 당시 태어난 아이들을 ‘고구마 아이’라 불렀다. 70년 이후 빈곤극복을 위해 정부 주도로 산아 제한정책인 계획생육이 시작되는데 남자 아이를 더 낳아서 대를 잇겠다는 마을 주민들과 산부인과 의사를 비롯한 관료들의 갈등이 높아지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야기 중심 인물은 소설 속 주인공의 고모 ‘완신’이다. 고모는 항일 혁명 열사의 딸로 태어나 신식 의술을 익혔고 17살 때부터 고향 위생원에서 신생아 출산을 돕는다. 비과학적이고 비인간적인 산파들을 몰아내고 안전하게 출산하는 의술을 펼쳤지만 비행기 조종사 애인이 타이완으로 망명하며 당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 문화대혁명의 시기에 고초와 조롱을 견뎌내다 정부에서 내세운 계획생육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역할을 한다. 정관수술과 임신 중절 수술에 나서고 친조카의 며느리까지도 낙태를 하게 만들며 정부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동네 사람들과 갈등하고 많은 어린 생명과 산모의 목숨을 희생시키다가 은퇴 후 속죄의 시간을 갖는다.
소설에는 진짜 현실에 있을 법한 다양한 군상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출신 성분 좋지만 이기적인 왕자오, 권력의 흐름에 민감한 샤오상춘, 탐욕스런 샤오샤춘, 순정파 춘허와 왕간, 남편에게 아들을 낳아 주고 싶어 조금의 불법도 마다않는 왕런메이와 샤오스쯔. 순박하지만 한번 좌절한 뒤 헤어 나오지 못한 천비, 막무가내 장취안과 그의 망나니 자식들, 고상하지만 무력한 소설 속 화자인 주인공까지. 제각각의 사연을 갖고 있는 다양한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이 소설의 큰 재미이다.
소설은 다양한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선사한다. 1부에서 5부까지 앞 부분은 ‘스시타니 요시토’라는 미상의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한다. 3부까지의 내용은 과거의 회상이고 4부에서 현재 시점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20여년의 시간을 훌쩍 건너뛰며 과거와 현재가 대비된다. 5부는 화자의 치부가 극적으로 드러나도록 극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소설의 작가인 모옌과 소설 속 화자이자 작가인 커더우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픽션과 넌픽션의 경계도 헷갈린다. 중국의 독재 정치 상황에서 작가가 안전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치일 수 있다. 덕분에 독자들은 낯설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소설 곳곳에 중국 민간설화와 상징이 등장한다. 작가가 ‘환각 리얼리즘’을 탄생시켰다고 평가 받을 만하다. 새끼 개구리 한 무더기를 낳은 처녀 이야기, 3000년 전 가라앉은 진흙으로 만든 점토 인형이 예술가 피를 담고 있어 정령이 되고 매달 보름달이 뜰 때면 피리소리에 맞춰 춤을 춘다는 이야기, 시주를 많이 한 여인에게 잉태의 복을 내린다는 낭랑 여신 이야기 등. 책의 제목이기도 한 개구리는 다산과 영생을 상징한다. 황소개구리에서 항산화 물질을 추출하여 노화를 막을 수 있다거나, 황소개구리 양식장에서는 대를 이을 수 있는 은밀한 거래가 있다는 것은 현대판 설화로 읽힌다. 판관 포청천의 현신처럼 보이는 가오멍주의 판결 장면은 꿈 속에 있는 듯 느껴진다.
완신이 개구리떼의 습격을 받는 장면은 특히 몽환적이고 신비로우며 무섭기도 하다. 한밤중 달빛 아래 병원 숙소로 돌아가던 중 두꺼비, 개구리 소리가 정신없이 울려 퍼진다. 곡소리로 들리고 수없이 많은 간난아기가 우는 소리로도 들린다. 완신은 원한과 굴욕이 깃든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도망을 가는데 은빛 실이 길바닥과 발바닥을 얽어매어 허우적댄다. 개구리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잡아당기고 오줌을 싸댄다. 귓볼을 물어뜯는다. 수많은 개구리들이 엄청난 대군이 되어 몰려오고 앞길을 막아선다. 완신이 계획생육이라는 정책을 무자비하게 집행했지만 내적으로 산모와 아기에게 얼마나 죄의식을 느꼈을지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다 옷이 찢기는 찰나에 점토 공예가 하오다서우를 만나고 운명처럼 결혼에 이른다. 늙은 부부는 태아의 죽음에 용서를 빌고 새 생명을 점지하며 점토 인형을 빚고 속죄한다.
이 소설은 중국 현대사를 잘 몰라도 등장인물의 감정과 행동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중국과 우리가 서로 정치, 경제 체계와 기질이 다르지만 공유하는 정서가 있고 근대화 과정에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익숙한 설화와 새로운 문단 구성 덕에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다. 중국이 최근 겪고 있는 빈부 격차, 이기주의, 탈법과 편법은 고스란히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닥친 고령화 문제는 곧 중국에 닥칠 현실이다. 이런 색다르고 재미있는 소설을 통해서 서로 알아가고 혐오의 감정을 조금씩 씻어 내면 언젠가 서로에게 도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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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 YES24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가둘 수 없듯, 여자가 아이를 낳는 일도 절대 막아서는 안 된다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포크너, 마르케스에 비견되는 현대 문학의 거장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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