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머무는 저지대에서, 줌파 라히리 <저지대>서평
기억이 머무는 저지대에서, 줌파 라히리 <저지대>(2014, 마음산책)
소설 <저지대>(2014, 마음산책)는 인도의 혼란한 시기에 뜨겁게 살다 죽은 한 청년과 그가 남긴 아이와 가족들의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부레옥잠이 무성한 저지대는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도 늘 그 자리를 지키는 부레옥잠의 이미지는 소설에서 반복해서 등장한다. 부레옥잠은 연못이나 호수같이 유속이 느린 수원지에서 자란다. 관상용으로 기를 정도로 꽃이 이뻐서 옥비녀라는 이름이 붙었다. 7~8월 뜨거운 여름에 꽃이 피며 하루 만에 진다. 유성생식을 하는 동시에 줄기가 뻗어나가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무성생식을 할 정도로 번식력이 강하다. 역사와 운명에 흔들리지만 정체성과 행복을 찾아가고 새로운 방식의 가족관계를 맺어가는 소설 속 주인공들과 닮아 있다.
작가 줌파 라히리는 인도 캘커타 폭동이 일어난 1967년에 벵골 출신 영국 이민자 가정에서 출생했다. 이후 미국 로드아일랜드에서 성장했다. 작가는 첫 장편소설<축복받은 집>을 1999년에 출간하고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두 번째로 내놓은 이 장편소설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인도 저항 운동이 중요한 소재이고 인도 캘커타와 로드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가는 가장 자신 있게 풀어놓을 수 있는 이 소설을 통해 맨부커상 등의 주요 문학상 최종심에 오른다.
이 책은 비졸리와 남편, 수바시와 우다얀 그리고 가우리, 벨라와 그의 딸 메그나까지 4대에 걸친 이야기를 담아낸 대하소설에 가깝다. 인도의 정치와 사회적 흐름이 한 가족의 삶에 영향을 주는데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 개인이 무기력하게 휩쓸리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는다. 영국에서 독립했지만 부조리가 가득했던 인도는 나라가 쪼개어지고 과격한 정치세력이 지역을 번갈아 지배한다. 이상주의자 우다얀은 좌익운동에 가담하고 친구 여동생 가우리와 결혼한다. 1967년 캘커타 폭동에 관여했다가 우다얀은 총살을 당하고 그의 형 수바시는 우다얀의 아이를 가진 가우리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을 한다. 조카인 벨라를 자신의 딸처럼 키우고 가우리가 철학을 공부할 수 있게 돕지만 가우리가 떠나고 벨라도 방황하며 결국 수바시는 혼자가 된다.
소설은 다양한 은유를 통해 독자를 끌어당긴다. 우다얀의 편지에 전해온 참새 한마리. 덧문을 통해서 형제가 같이 쓰던 방으로 들어왔다가 날아가 버리는 장면은 형제와 가우리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비오는 날 스쿨버스를 타러가는 벨라가 엄마 손을 이끌고 길 위의 죽은 지렁이 무리를 보여줄 때 가우리가 저지대에 떠다니던 시체를 떠올리게 된다. 소설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저지대는 물이 고이는 물리적 공간이고, 우다얀에 대한 수바시와 가우리의 기억이 머물러 있는 곳이다. 딸 벨라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편안한 아빠의 품이며, 캘커타와 로드아일랜드가 공유하고 있는 특성이기도 하다. 우기가 끝난 뒤 빠져나가지 못한 물이 썩는 저지대는 인도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고인의 죽음을 경건하게 떠올리는 추모비가 있던 저지대 가장자리가 쓰레기로 뒤덮히며 우다얀의 기억이 잊혀져버린 장면은 퍽 인상적이다.
소설은 각 장마다 번갈아 가며 특정 등장인물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주요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수바시가 가오리에 느끼는 복잡미묘한 감정, 둘째 아들이 죽고 며느리를 비난하고 외면할 때의 시어머니 비졸리의 비통한 마음과 무력감.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다얀의 시점에서 아내와의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독자들은 숨을 죽이며 안타까워하게 된다. 작가는 잔잔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면서도 독자의 감정을 격하게 뒤흔든다.
가우리는 다면적이고 현실적이며 매력적인 인물이다. 부모의 뜻을 거스르며 결혼식을 올리되 시부모의 구박을 말없이 견딘다. 자신이 낳은 어린 딸과 정서적 교감이 없이 지내고, 자신에게 한없이 따스한 수바시와 끝내 심리적 거리를 둔다. 남편과 딸이 캘커타 방문한 틈에 로드아일랜드를 떠나 철학이라는 주제를 붙들며 외지에서 삼 십 여년을 떠돈다. 자신의 꿈과 욕망에 충실하다. 한참 나이가 든 뒤에 인도 방문한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전에 한 경찰관 가정의 파탄에 가우리가 개입되었음을 알게 된다. 우다얀의 죽음과 그녀의 연결고리를 알아채면 그녀의 변신을 이해할 수도 있다.
가우리가 잉태한 딸아이 이름은 벨라. 벨라는 힌디어로 재스민 꽃을 의미하고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샤켈 벨라는 아침, 비켈 벨라는 오후, 라트리르 벨라는 밤을 뜻한다. 우다얀의 어머니 비졸리는 우다얀의 죽음 이후 재스민 꽃을 저지대의 가장자리 추모비에 올려두는 의식을 죽을 때까지 한다. 우다얀의 시간은 결코 시들지 않고 어머니의 손 끝에, 가우리의 가슴 속에 그리고 형 수바시 기억에 머문다. 체 게바라는 “혁명은 중요한 것이고, 우리들 개개인은 무가치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 얘기했다. 역사는 무가치해보이는 개개인을 잊을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은 이야기한다. 우다얀의 손녀 메그나는 언젠가 그의 이름과 존재를 가슴에 품으며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거라고, 어떻게든 뻗어나가는 저지대 부레옥잠 뿌리처럼.